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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탈출/읽기

할머니의 편지 '마음가는대로'

 

       

     『 마음가는대로 - 수산나 타마로』

 

 

이책은 할머니가 손녀에게 35일간 쓴 15통의 진솔한 고백이 담긴 편지다.

어느 늦가을 할머니 올가는 죽음을 앞두고 멀리 떨어진 손녀에게 글을 쓰는 것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려 한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의 성장, 무뚝뚝하고 역시 가부장적인 남편과의 사랑없는 무미건조한 결혼생활, 그리고 우연히 여행에서 만난 의사와의 짧지만 열정적인 사랑과 뜻하지 못한 이별,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딸 그리고 갑작스런 딸의 죽음, 남겨진 어린 손녀, 그녀에게 전하는 삶과 사랑, 자신이 떠나간 후에 홀로 남겨질 손녀가 간직할 수 있도록 자신의 일상, 살아온 세월, 그리고 은밀히 감춰두었던 고백의 이야기를 담담히 써내려 간다.

 

섣불리 말할 수 없었던 굴곡진 사연들. 결혼, 불륜, 가족과의 불화. 내면의 갈등. 혼란들을 마치 동화책을 읽어주듯 조근 조근 들려준다. 그녀의 편지를 따라가다 보면 어쩐지 내 마음의 응어리가 스르르 풀리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흔히들 운명은 환경과 유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지. 그렇다면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있긴 한 걸까? 모르겠구나. 이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되고 또 유전되다가, 어느 순간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온힘을 다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 끝없는 운명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공기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삶의 순환 속에 숨겨진 작은 비밀일 거야. 작지만 아주 강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더욱 두려운 비밀"

 

하루하루 쌓여가는 일상 속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낄 때 즈음,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면 후회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순순히 마음가는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너무나 많은 잡소리와 시작을 어지럽히는 환경들이 중심이 되어 꼭 흐지부지 나를 버리고 나자신의 주변으로 치부해버린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소중한이에게서 선물로 받은 이 책은, 요즘 푹 빠져 있는 기욤뮈소의 책에 인용되었다는 띠지의 문구가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았었다. 손녀에게 남기는 편지인 동시에 할머니 올가의 회고록이었던 이 책은 짧지만 와닿는 문장들이 곳곳에 있었다. 할머니의 철학적 이야기들, 삶의 지표들, 경험으로부터 푸짐하게 쏟아져 나오는 문장들이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시던 내 할머니의 음성처럼 포근한 느낌으로 잔잔하게 많은 것을 남겨 놓았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일상 속에 있어.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복잡한 생각들을 버리고,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보는데서부터 출발하면돼. 진정한 내 것이 아닌 것들, 외부에서 들어온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다면 넌 제대로 가고 있는 거야"


"난 시간은 낭비해도 상관없다고, 인생은 달리기 경주가 아니라 활쏘기 게임 같은 거라고 대답해 주었지. 중요한 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과녁의 중앙을 맞힐 수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손녀가 스물넷이 될 때 할머니는 저세상으로 가고 없을거라고 얘기한다. 자신이 겨울잠쥐나 작은 새, 혹은 집거미로 다시 태어나 손녀 옆에 지내길 바란다고 한다. 할머니는 손녀를 무척 사랑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죽게될까봐 무서워하고 울던 손녀를 떠올리면서 할머니는 자신이 먼저 죽어도 행복했던 기억안에서 살길 바란다고 한다. 그리고 가야만하는 아쉬움의 길 앞에 손녀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한다.

 "네 앞에 수많은 길들이 열려 있고,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모를 때, 의심하지 말고 깊은 심호흡을 해봐.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리고 또 기다려. 네 마음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봐, 그러다 네 마음이 말을 할 때, 그때 일어나 마음가는대로 가거라."

손녀가 자신이 죽고 없을 때 당황해 하지 않길 바라고 손녀가 슬픔에 오랫동안 방황하지 않길 바라며 나무를 가꾸고 강아지도 키우고 둥지로부터 떨어진 작은 새들을 돌보던 추억을 떠올리며 그런 좋은 추억만 회상하라고 말한다.

 

이 책을 보면 내 어릴적 매일 새벽녘마다 들려 주셨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와 엄마의 인생 이야기, 엄마가 가슴깊이 담아 쓴 마음의 편지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서 처럼 '모든 엄마는 한때 딸이었고, 모든 딸들은 훗날 엄마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할머니가 처음부터 할머니였던것처럼,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던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그래서인가 예전에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옛날이야기에서 어릴적 동네 언니와의 소꿉장난과 오빠들과의 에피소드, 서당을 하던 아버지 이야기와 늘 앞마당을 쓸던 머슴아저씨 이야기에서 말씀하신 엄마, 언니, 오빠, 아저씨, 아버지라 부르는 호칭이 참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지금은 예전처럼 흥미로운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는 들을 수 없지만, 할머니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익숙한 할머니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큰 행복이다.